사대부 세계의 군계일학
한국사 중에서는 조선의 역사를 가장 좋아하지만 그만큼 탄식도 많이 나올 따름이다. 조선은 건국 이념인 유교 사상으로 고려 왕조를 무너뜨렸지만 유교 사상으로 쇠퇴하고 멸망했다. 그런 답답한 정치 체계 속에서도 조선을 바른 길로 이끌어가려는 몇몇의 관료들이 있었으니 이번에 소개되는 조선의 재상들이다.
조선의 역사를 요약해보라고 하면 나는 '코스닥 개잡주'라고 하겠다. 상장 초기(태종 ~ 문종 대)에만 반짝 상승하고 400여 년간 단 한번의 반등없이 내리막길을 걸었다고 본다. 한번씩 데드캣 바운스(성종, 정조)라도 있었지만 절대 전고점은 못뚫었다.
나는 이 한계가 유교보다는 당파 싸움으로 보는데, 결국 당파 싸움도 유교에 기인한 것이긴 했다. (하지만 유교가 아니라도 정치는 항상 정반합(正反合)인데, 한반도에는 합(合)이 없는 것 같다.) 조선이 살아남기 위해선 유교를 버리거나 새로운 이념을 도입하는 수밖에 없었는데 기득권층이 자신의 권리를 절대 내려놓지 않기 때문에 그런 일은 없었을 것이다.
결국 조선의 정치는 유교를 벗어나지 못하고 유교적 질서 내에서 이상적인 사회를 만드는 것에 집중할 수밖에 없었는데 그중에서도 현대적 관점에서도 대단한 사람들이 있기는 하다. 그렇다고 아래 언급한 사람들을 다 좋아하는 건 아니다.
참고로 나는 역사, 철학서에 저자의 의견이 들어가는 걸 좋아하지 않는데 이 책은 저자 의견이 조금씩 들어가있다.
정도전
정도전의 재상중심주의가 제대로 이루어졌다면 어땠을까 종종 생각한다. 조선의 큰 사건들은 왕가 또는 외척세력 등에 의해 일어난 경우가 많았다.(계유정난이든, 문정왕후의 섭정, 조선말 세도정치 등등...) 물론 재상이라고 해서 전부 잘 했다고 할 순 없지만 종신직인 왕보다야 나았겠지 생각한다.
또한 명나라에 대한 의리를 강조하던 사림파와 비교해서 개국공신(관학파) 세력은 훨씬 자주성이 있었으니 정도전이 성공했다면 자주 조선을 만들 수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의 사상은 너무 급진적이었고 특히 왕권 강화를 목표로 하는 이방원과는 극상성이었다. 이방원과의 대결에서 이겼어도 조선 내에서의 정당성은 잃었을 것이다. (이성계의 신임도 잃었겠지?) 외통수였던 것 같다.
신숙주
나는 (주)조선의 주가 변곡점을 꼽으라면 계유정난을 꼽는다. 아마 많은 사람들도 여기에 동의할 것이다. 그리고 이 계유정난에서 한명회와 함께 신숙주가 항상 언급된다.
세종 - 문종 - 단종 대는 조선 최고의 황금기였다고 자부한다. 머리가 좋은 왕들에다가 적장자라는 유교 사회 최고의 정통성까지 있었으니 신하들이 왕을 도와 바르게 나라를 이끌어가기만 하면 된다. 하지만 계유정난으로 인해 정통성이 떨어지는 세조가 즉위했고, 나는 이후의 왕권 약화의 모든 일들은 세조 탓이라고 생각한다.
어쨌든 신숙주는 경제, 외교적인 부분에서 두각을 드러냈지만 이 책에 들어올만큼인가...? 라는 생각은 했다. 나는 차라리 한명회가 낫다. 비록 세조의 책사로서 살생부로 여럿을 죽이고 단종을 폐위시키는데 크게 일조했지만... 무언가를 이루기 위해 인생을 포함한 모든걸 다 건다는 걸 보여줬기 때문이다. 반면 신숙주는 그저 배신의 아이콘일 뿐이다.
조광조
이 사람이야말로 유교 탈레반이라고 할 수 있겠다. 이 사람의 개혁이 성공했어도 나는 조선이 나아졌을거라고 보지 않는다. 더 확고한 유교 사회에서 빠르게 멸망했을 것이다. 현량과 실시, 위훈 삭제 등은 결국 훈구파를 견제하고 자신의 세력을 넓히기 위함이었다. 게다가 소격서 폐지를 주장하면서 명나라에 대한 지나친 사대를 보였는데, 사림파의 한계를 여실히 보여준 것이었다.
정치든 경제든, 이념과 실제가 조화를 이루어야 하는데 조광조는 유교 경전으로만 모든 일을 하려고 했다. 또 그마저도 자신의 정당성이나 세력을 위해 했다고 생각한다.
최명길
"난세가 영웅을 만드는 법이다"이라는 문구에 잘 어울리는 사람이라고 생각한다. 서인이자 인조반정의 1등 공신임에도 놀랍게도 지극히 현실주의자였다. 주화파로서 청나라에게 항복문서를 썼지만 청타이지 앞에서는 명과의 의리를 저버릴 수 없다고 하였다. 환향녀가 정조를 잃은 것은 그들의 잘못이 아니니 이혼은 안된다고도 하였다.
병자호란이 아니었으면 후대에 임팩트있게 기록되지 못했겠지만 전쟁을 거치면서 그의 충성심과 뛰어난 현실감각이 모두 빛을 발했고 현대에서도 많은 가르침을 준다. 조선에 이러한 현실주의자들이 많았고 생각을 더 발전시켰으면 유교 사회를 벗어나고 개화기에서도 살아남을 수 있지 않았을까 생각해본다.
기타
그 밖에도 많은 재상들이 소개되었지만 ... 글쎄다. 나에게 조선의 역사란 역사적 사실로서 그런 일이 일어났다는 것, 그리고 그게 현대까지 이어져 많은 영향을 준다는 것이 재밌을 뿐 조선의 역사가 대단하다고 생각하는 건 아니다. 마찬가지로 그 사회에 몸을 담았던 재상들도 현대적 관점에서는 대단하게 느껴지지 않는다. 물론 그 당시의 시각으로서 보면 유학의 대가들로서 매우 유능하고 똑똑한 사람들이지만 항상 이랬으면 어땠을까 저랬으면 어땠을까라는 생각이 겹쳐서 아쉬움이 많이 남는다.